어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를 궁금해하고, 알아가기 위해 질문을 한다.
당신의 이름이나 나이, 배경, 경력 등 분명 궁금해 할 것들이 많을텐데 이상하게도 회사라는 집단에 가면, 특히 이번에 들어간 회사에서는 유난히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 사생활적인 부분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어쩔 땐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어본다.
(오히려 또래집단에 있을수록 그러한 질문이 더 조심스럽게 들어오거나 내 은연 중의 말에서 나오곤 한다)
아마 그들에겐 미혼인 내게 가장 무난하게 물을 수 있으면서도 따분한 회사 속의 소잿거리가 되기 쉬우며, 앞으로의 내 인생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소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실은 나는 이 질문들이 굉장히 불편하고 답변하기 까다로웠다.
남자친구가 현재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준비와 일들을 하고 있는지, 몇 살인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위축되며 꽤 불쾌했다. '나는 남자친구를 부끄러워하는가?' 정리되지 않는 기분에 죄책감이 들어 미안하기도 했다.
숨기고 싶기도 했지만 계속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결국 나의 남자친구에게 뱉어졌다.
신기하게도 내가 처음 한 말은 [나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 였다.
네 남자친구는 뭐하니?
학생입니다.
대학원생?
아뇨, 학생입니다. 재수와 휴학을 했습니다.
그럼 곧 졸업하겠네?
아마도요?
그럼 어디 시험 준비해?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죠.
남자친군데 그것도 잘 몰라? 네가 남자친구 먹여살려야 하는거 아냐?
굳이 일일이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제 밥벌이 정도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우리 나이에는 당연히 번듯한 직장과 직업을 가지도록 노력하여 경제활동을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해서 집을 사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들을 잘 길러 좋은 대학과 직장에 보내는 것을 생각하고 기대한다. 생각보다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이 농협에서는 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년이 보장된 농협에서 20~30년 한 직장에 근무하며 월급을 받으며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대다수인 이곳에서 나는 당연, 내 남자친구까지 비정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
내가 왜 저렇게 답했을까?
네 남자친구는 뭐하니?
학생입니다.
대학원생?
아뇨, 학생입니다. 재수와 휴학을 했습니다.
그럼 곧 졸업하겠네?
아마도요?
(정말 잘 모른다. 이전에 대학 졸업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정상 학기를 보낸 적이 적고, 워낙 관심분야가 많아 최근에 여러 수업을 듣는 중이라 졸업학점을 채웠는지, 어떤 진로를 확정지었는지, 정확히 몇 학년인지 잘 모른다. 학교 생활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는 편이라도 일일이 간섭하거나 내가 나서서 챙겨주지는 않는다. 나는 그가 학부 졸업하면 진정으로 축하할 것이고, 졸업하지 않더라도 응원해줄 것이다)
그럼 어디 시험 준비해?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죠.
(오랜기간 그와 교제하며 많은 이야기를 해왔기에, 소통과 관심 부족으로 당신이 무얼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본인 전공 수업도, 관심가는 분야의 수업들을 초과학점을 들으며 열심히고, 동아리도 여럿 들어 취미생활에 시간을 쏟으며,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형성하며 그의 경험과 영역을 넓히며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뚜렷한 목표로 달려가고 있는지 나는 모를 뿐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설명하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이 원하는 '세무사를 준비해요, 공기업을 가고 싶어해요, 전공 공부를 하고 있어요 등' 그 보편적인 짧은 대답을 하기 어려웠고, 앞의 이야기를 다 한다고 해서 이해해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대답했다.
또 그는 나처럼 현실에 순응해 어쩔 수 없이 ncs를 공부하고, 회사에서 맡겨준 본인이 하기 싫은 일에 책임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숨기고 묵묵히 하라는대로 하는 사회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고 서로 말을 나눈 적이 있었기에, 비슷하게 둘러댈 말도 없었다. -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남자친군데 그것도 잘 몰라? 네가 남자친구 먹여살려야 하는거 아냐?
굳이 일일이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제 밥벌이 정도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웃으며 넘어갔지만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밥을 굶을 사람은 나다. 직장을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는 그가 나와 비슷한 돈을 관리하고 있으며, 늘 새롭고 신기한 모임에 참여하고 인연들을 만들며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남자친구가 나를 먹여살리면 살렸으리라 예측한다. 나는 백수일 때 철저히 사람과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사람이었고, 변변한 알바자리도 잘 구하지 못했으며, 투자는 영 재능이 없었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도 농협 들어오라고 해~
특히 농협이나 금융권과 같이 보수적/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폐쇄적인 곳, 조합원과 고객의 민원이 발생하면 무조건적으로 을이 되어야만 하고, 계급과 호봉이 절대적으로 평가받는 수직적인 직장과 그는 그는 상극일 것이다.
(관찰자적인 포지션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워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그에게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길 바라지도 않으며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나에게 계속 그래왔던 것 처럼 나는 당신 그대로가 좋아 너의 이야기를 듣고, 하고자 하는 일을 응원하고, 힘들 땐 안아주고, 같이 걸으며 그가 당당한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짜피 이해하지 못할 것 결론만 말하자는 전략은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솔직하게 나를 드러낸 순간 그들은 그 다음 대답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불편해졌고, 그들의 불편한 감정과 태도는 내 기분인 것 마냥 내게 전가되었다. 남자친구가 부끄러운건 내가 아니라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들이었다.
그렇게 정리된 내 이야기를 3가지로 압축해 남자친구에게 말해주었다.
1. 너는 열심히 살고 있다.
2. 나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
3.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내 주변인들에게) 무언가를 꼭 보여주기 위해 직업이나 취업을 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너가 명확하게 뭐가될진 모르겠지만, 미래의 너는 뭔갈 열심히 하곤 있을 것 같다.)
이 세마디에 그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너무 남에게 솔직하게 말한 것도 웃기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따뜻했다고 했다.
대학을 다닐 때 부터 취업을 할 때 까진 나는 사회적시선과 가족이라는 틀에서 앞으로 무얼해야할지 매일을 괴로워했고 결국 현실에 수긍하며 퇴사와 이직을 하며 이곳까지 오게되었다.
나는 아직도 주 5일 9시간 이상을 밖에서 활동하는 취업을 해 매일이 오늘 같은 날들을 보내는 지금의 상황이 맞는지, 약을 먹지 않으면 전혀 할 수 없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게 맞는지, 내 가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무난하려 애쓰는 내가 되는게 맞는지, 모험을 좋아하던 우리가 내 힘듦으로 너무 평범한 일상만을 보낸게 맞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런 내 곁에서 그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이끌어내 들어주고,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도록 해 주며 내가 무엇을 하길 강요하지 않았다. 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로 살길 바랬고, 나의 어떤 선택이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설상 그가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대도 이해해주고 보듬어줬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도 늘상 세상과 내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혼란스러워 하는 나 자체를 받아들이며, 함께 헤쳐나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만큼은 나는 항상 내가 되고 싶었던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게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행복이다.
그가 그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나를 위해 말해주었 듯이
나도 이제 그에게 들은 말을 그를 위해 해줄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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